[김영래 예술 칼럼] 누가 국립발레단을 이끌어야 하는가 — AI에게 물었다지금 한국 발레에 필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리더십’이다[예술 칼럼] 누가 국립발레단을 이끌어야 하는가 — AI에게 물었다
지금 한국 발레에 필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리더십’이다
국립발레단의 차기 단장을 둘러싸고 말이 많다. 누가 거론된다더라, 누구는 안 된다더라 하는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그 논의를 지켜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던지고 있는 질문이 본질에서 조금 벗어난 작은 질문이 아닐까. “누가 그 자리를 차지하느냐”가 아니라 “그 자리에 어떤 사람이 앉아야 하느냐”를 먼저 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한 가지 흥미로운 시도를 해보았다. 차기 단장 선임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제3자 — 어떤 후보도, 어떤 파벌도, 어떤 정권도 편들 이유가 없는 인공지능 클로드(Claude)에게 물었다.
“지금 한국 발레에는 어떤 리더가 필요한가.”
특정 인물은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고, 오직 리더의 자질에 대해서만 답해달라고 요청했다. AI는 누가 후보인지 알지 못한다. 알 필요도 없다. 그래서 오히려 이 질문에 가장 정직하게 답할 수 있는 화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질문의 전제부터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은 이미 세계가 탐내는 무용수를 길러내는 나라이다. 다섯 살, 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영재를 발굴해 십수 년 동안 가정과 학교, 국가가 함께 자원을 투입해 육성한다. 사실상 국가가 길러낸 인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 한국 무용수들은 파리오페라발레의 에투알로, 마린스키 발레의 수석무용수로, 세계 정상의 무대마다 주역으로 서고 있다. 이는 의심할 여지 없는 성취이다.
그런데 데이터를 들여다보면 역설이 보인다. 그 눈부신 성취가 대부분 국외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십수 년을 들여 길러낸 최고의 인재들 앞에 국내에서 열려 있는 직업 무용수의 자리는 많지 않다. 그래서 가장 뛰어난 재능일수록 해외로 향한다. 또 어떤 이들은 무용계를 떠나 대중문화와 공연 산업으로 진출한다. 그것 역시 한국이 만들어낸 또 다른 성취이다.
여기서 누구를 탓할 수는 없다. 해외로 나간 무용수들의 선택은 정당한 도전이며, 다른 길을 선택한 이들의 재능 역시 존중받아야 한다.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구조이다. 한국은 개인의 기량과 성취라는 ‘수출 가능한 탁월함’을 길러내는 데는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그 인재가 국내에서 무용만으로 한 평생을 살아갈 수 있는 토대는 아직 충분히 만들지 못했다.
그러므로 한국 발레의 리더가 답해야 할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이 땅에서 한 사람이 순수하게 무용만으로 예술과 생계를 함께 세울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다고 본다.
세계적인 무용단은 걸작을 잘 수입한다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기만의 작품과 정체성을 생산할 때 비로소 세계적인 무용단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예술적 비전이 20년, 30년 동안 흔들림 없이 축적될 때 가능하다. 그렇다면 필요한 리더의 자질은 화려한 경력의 목록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능력에서 나온다.
첫째, 긴 시간을 사고하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이다. 다음 시즌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설계를 지속할 수 있도록 보호받는 임기와 제도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둘째, 창작의 비전과 안목을 가진 사람이다. “이 단체가 세상에 무엇을 내놓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자기 언어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수입자가 아니라 생산자여야 한다. 그리고 그 창작은 궁극적으로 무용수 자신에게서 나와야 한다. 한국 무용수의 비범한 기량은 남의 안무를 완벽하게 재현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자기만의 춤을 말하기 위한 언어이다. 세계적인 무용단의 무용수는 해석자인 동시에 창작자이다. 따라서 필요한 리더는 단원의 기량을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단원 안에 잠들어 있는 창작자를 깨우는 사람이다. 무용수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의 춤’을 출 수 있을 때 그 단체는 비로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고유한 목소리를 갖게 된다.
셋째, 일자리와 무대를 길러내는 사람이다. 무용수를 길러내는 데 이미 세계 최강인 나라에 지금 필요한 것은 안무가와 레퍼토리, 그리고 직업으로서의 무용을 키워내는 리더이다. 가장 야심 있는 재능에게 “여기에 너의 무대가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넷째, 동의로 작동하는 권위를 가진 사람이다. 춤은 강제로 만들어지는 예술이 아니다. 리더의 비전은 단원들의 마음속에 내면화될 때 비로소 무대 위에서 살아난다. 형식적으로 부여된 권위가 구성원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리 정당한 권위라 해도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단원은 관리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미래를 만들어 가는 공동 창작자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최근 국립발레단 단원들이 “현장을 아는 전문성을 최우선 기준으로 삼아 달라”고 한목소리를 낸 것은 전적으로 타당한 요구라고 본다. 그들은 무대를 아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 그 목소리는 충분히 경청되어야 한다. 그 현장은 국립발레단 내부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아무리 훌륭한 리더라도 짧은 임기와 정치화된 구조 속에서는 끝내 실패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진정 물어야 할 것은 “이번에 누구를 앉힐 것인가”가 아니다. “우리는 그런 리더를 알아보고, 세우고, 흔들리지 않게 지켜줄 의지가 있는가”이다. 리더의 자질만큼 중요한 것은 그 자질을 지켜낼 체제의 자질이다.
AI의 답변은 여기까지였다. 이해관계가 없는 화자의 입을 빌려 들으니,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작은 질문에 매달려 있었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직업무용수 출신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다. 누가 그 의자를 차지하느냐의 문제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자리에 앉는 사람이 다섯 살부터 길러온 우리 아이들에게 무대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인가 하는 점이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함께 물어야 할 질문이다. 그리고 그 답에 걸맞은 조건, 즉 탈정치화된 선임 구조와 안정적으로 보장되는 임기, 그리고 단원의 신뢰와 동의를 세우는 일은 결국 한 사람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 발레의 미래를 결정할 우리 모두의 몫이다. <저작권자 ⓒ 데일리미디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국립발레단 예술감독 관련기사목록
|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