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검스님 불교칼럼] 보검 스님이 만난 인물: 참선 명상 전문가 실상(영각)선사“참선 명상이란 ‘이뭐꼬’에 모든 것을 집중하는 것입니다.”사람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저 밥 잘 먹고, 잠을 잘 자고, 먹으면 소화 잘되고 배설 잘하면 사는 데 만족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왠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1차 적인 행복감이나 만족감 정도로는 안 되는 분들이 많다. 여기서부터 인간은 고통이 수반된다. “왜 사는가?” 가 화두가 된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이며 왜 사는 걸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는데, 이것은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철학적이며 종교적인 의문이 생긴다.
지난 26일 오후 2시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실상(영각)선사와 차 한잔의 시간을 가졌다.
본래 참선하는 수좌들은 커피를 잘 마시지 않지만, 21세기 선사들은 커피도 즐겨 마신다고 한다.
전통은 오래된 시간의 연속이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선사(禪師)들은 시대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 순리라고 했다.
사실은 녹차를 주문했지만, 준비가 안 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커피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실상 선사는 선원에서 여래 해를 보내다가 지금은 화성에 조그마한 선원(토굴)을 겸해서 포교당(화성 법륜사)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마침 인연있는 일붕 서경보 존자의 문학상 시상식이 있어서 서울 나들이를 하게 됐다고 했다.
영각(실상) 스님은 처음에 삭발염의할 때, 인간이나 우주의 근본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심각한 의문을 갖고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막상 머리를 깎고 가사 장삼을 수하면서 순간적으로 충격적인 전율이 온몸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고 하는데, 마음속 깊은 곳에서 들려 오는 소리가 “너는 왜 중이 되었나!”하는 물음이었다.
이때부터 출가자의 본분을 생각하게 됐고, 참선 명상을 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고 한다.
영각선사는 지금까지 승려란 이름을 달고 살아오면서 주로 참선 명상을 해오고 있다.
최근 가야산 해인총림 방장으로 취임한 학산 대원 대선지식으로 부터 ‘이뭐꼬’란 화두를 받고서 오직 일념으로 지금 이 순간까지 정진하고 있다.
출가제도는 불교에서 처음 생긴 제도는 아니다.
출가는 인도에서 불교 이전의 인도 종교들에서 이미 행하여진 것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고요한 산림한처(山林閑處)에서 수행하는 풍조가 힌두교 등에 이미 있었다. 고타마 싯다르타 시대에 이런 출가 시스템이 있었던 것이다.
힌두교에서는 남성 출가자를 산야신(Sannyasin)이라 하고, 여성 출가자를 산야시니(Sannyasini)라고 하는데, 지금도 인도에서는 이런 출가전통이 계승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고타마 붓다는 29세 때에 출가하였는데, 이미 힌두교의 전통에 따라서 출가하였다. 그렇지만 나중에는 고타마 붓다 승단을 독자적으로 구축했다. 이로써 고타마 붓다 문하로 출가자가 생기게 되었고 결국 오늘날처럼 불교 승단이 형성된 것이다. 물론 힌두교와 불교는 출가 시스템은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할지라도 지향하는 바의 목적은 다르다.
부처님 승가의 전통이 중국에 전해지고 해동에까지 전해져서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 법을 만날 수 있는 지중한 인연이 도래한 것이다.
영각(실상) 선사는 해탈 자재 도인이 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얻게 된 것에 정말 부처님 은혜에 감사하고 있다면서, “불법을 만나지 못하였다면 나는 세세생생 오온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면 아찔하다고 했다.
그래서 “색수상행식 오온을 벗어 날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갖게 됨에 항상 감사한 마음이며 열심히 정진하여 해탈 도인이 되어서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정안종사가 되겠다는 일념”뿐이라고 했다,
영각선사의 설명에 의하면, 한국불교 선원에서 하는 참선 명상은 달마 관법인데, 벽관이 주가 된다.
벽관은 직접 벽을 마주하여 좌선하거나 몸과 마음이 고요하고 굳건한 벽처럼 번뇌와 망상에 전혀 흔들림이 없는 단정한 자세가 되어 좌선하는 수행법이다.
벽관이란 벽을 향하여 조용하게 관찰한다는 뜻으로, 면벽참선이라고도 한다.
벽관은 보리달마가 9년 동안 벽을 마주하고 좌선했다는 면벽구년의 좌선 수행법을 의미하기도 한다. 벽과 같이 마음과 몸을 모두 적정(寂靜)하고 부동(不動)하며 굳건하게 머물러 흔들림이 없는 좌선의 관법이다.
달마 대사 시대에도 화두가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한국불교의 선방에서는 벽관을 할지라도 화두를 들고 하는 것이 원칙이다.
달마의 벽관이 단순한 좌선의 모습만이 아니라 마음에 분별이 발생하지 않는 침묵의 모습으로 드러나 있었던 까닭에 몸은 움직임이 없는 좌선이면서 마음은 성성하게 깨어있는 상태임을 말한다.
이는 “달마대사는 숭산의 소림사에서 벽을 마주하여 좌선을 하였는데 하루 종일 침묵을 지켰다. 아무도 그것을 헤아리지 못하여 벽관바라문(壁觀婆羅門)이라 불렀다.”고 《경덕전등록》 권3, 보리달마전에도 기록 되어 있다.
달마는 벽관의 수행에 대하여 그 의미를 “밖으로는 모든 반연(攀緣)에 대한 집착을 멈추고 안으로는 마음에 혼란스러움을 없애서 마치 장벽과 같은 상태에 도달하게 되면 곧 깨달음에 들어갈 수가 있다.”라고 2조 혜가에게 가르쳤는데, 이것이 바로 벽관의 진정한 뜻이라고 했다.
한국불교의 선종에서는 달마대사의 벽관이 참선 명상의 거울이 아닐 수 없다.
영각 선사는 “부족하지만 나는 항상 학산 대원 대종사님의 지도에 따라서 참선 명상을 해오고 있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선종에서는 6조 혜능 대사의 《육조단경》을 소의 경전으로 삼는다. 《단경》에서 특히 강조하는 부분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째, 혜능(慧能)은 부처님 이래 전수되어 온 심인(心印)의 계승자라는 점이다. 여기에서부터 선사들의 법맥을 강조하는 학풍이 생겨났다.
둘째, 견성(見性)은 수도(修道)를 목적으로 한 것으로 자성(自性)을 떠난 부처는 없다는 교설이다. 이것은 중국 불교의 특성을 대변하는 학설로 조교(助敎)를 강조하는 측면이 부각되어 있다.
셋째, 돈오(頓悟)의 수행이다. 불도에서 깨달음을 서서히 추구해 들어가는 방법을 점수(漸修)라 하는데, 이는 주로 교종(敎宗)에서 선호되는 방법이다. 원래 돈오의 수행 방법은 선종의 요체(要諦)인데, 그 근원이 바로 이 책에서 비롯되었다.
영각선사는 부족하지만, “이런 원칙하에서 학산 대원 대선지식의 지도를 받으면서 정진하고 있다”고 하며, “언젠가는 누세의 업장이 다 녹아내리고 내외가 명철하여 확철대오의 대원경지의 묘각에 이를 것을 서원하면서 오직 ‘이뭐꼬’ 화두를 들고 정진할 따름이다.”라고 웃으며 자리를 떴다.
<저작권자 ⓒ 데일리미디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