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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칼럼] 보검스님이 만난 인물: 양수리 노적봉 용화선원 무진 선원장

반농반선(半農半禪)으로 백장 청규 지키며 정진

보검스님 | 기사입력 2025/08/02 [02:50]

[불교칼럼] 보검스님이 만난 인물: 양수리 노적봉 용화선원 무진 선원장

반농반선(半農半禪)으로 백장 청규 지키며 정진

보검스님 | 입력 : 2025/08/02 [02:50]

양수리에서 북한강을 따라서 청평 방향으로 10여 분 가량 가다 보면 양서면 건지지미길 56번길 13에 소재하는 노적봉 아래 토굴 용화선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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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간 양수리 노적봉 아래 용화선원에서

“일일부작이면 일일불식이라”는 백장청규를 실천하면서

정진하고 있는 무진 선원장과 대담을 나누고 있는 보검스님.

 

사찰이나 암자는 아니고 그야말로 토굴이나 다름없는 수행처일 뿐이다.

 

법당에는 불상을 모시지 않고 탱화만 봉안하였고, 신도님들의 시주에 신경 쓰지 않고 농사지으면서 자급자족하는 운영방식을 고수하고 있는데, 그래도 가끔 뜻있는 불자님들이 와서 무주상 보시를 하니 너무 고마울 따름이라고 했다. 

 

무진 선원장은 불교에 기반을 두면서 유불선 삼교와 조상숭배 그리고 고종 순종 명성황후를 위하여 춘추로 제사를 지내는 이색 도인이다.

 

“사람들은 무진 스님, 무진 법사, 무진 도사라고 제각각 호칭하는데, 무엇이라고 불러도 상관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필자는 무진선원장이라고 호칭하겠다고 하니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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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성수 대선사님을 사부님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받았다는 무진 선원장.

 

사실 무진 선원장은 반농반선을 하는 선객(禪客)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지금처럼 반농반선의 토굴 생활을 하게 된 것도 성수 대선사님의 영향이 크다고 했다.

 

젊은 시절에는 사업도 하고 큰돈도 벌었지만, 어느 날 돈이 낙엽처럼 보이면서 인생무상 세상무상을 느끼고 이곳 양서면 건지미길 노적봉 아래 40만 평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자연과 함께한 지도 어언 30년 세월이라고 했다.

 

남들은 이런 시골 산골에 오면 도시 생활을 못 잊어서 안달이 나지만, 무진 선원장 자신은 하루하루가 너무나 즐겁고 행복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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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화선원이 자리 잡고 있는 노적봉

 

무진 선원장은 한국불교에서 함허 득통, 허응당 보우, 경허, 만공, 경봉, 성수 큰 스님 등을 등불로 삼고 정진하고 있다고 했다.

 

또 한 고종황제, 순종황제와 명성황후를 위하여 춘추로 제사를 모시고 있는데, 여기에는 말할 수 없는 자신만의 비밀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봄에는 양력으로 3월 18일에 늦가을에는 11월 11일 날 제사를 모신다고 했다.        

 

무진 선원장은 직접 농사지으면서 거의 자급자족을 하고 있는데, 잠시도 일손을 놓을 수 없다고 했다. 가끔 찾아오는 분들에게 공양도 직접 손수 지어서 대접할 정도로 부지런하다.

 

백장회해(百丈懷海:749~814)는 당나라의 선승이다.

 

백장산(百丈山)에서 살았기 때문에 백장이라고 부르고 법명은 회해(懷海)이다. 위앙종과 임제종의 제9대 조사이다. 위앙종과 임제종의 8대조사인 마조도일의 제자이다. 당대에는 백장회해와 남전보원보다 대주혜해가 더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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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굴 용화선원 가는 길 입구

 

주요 제자로는 임제종 10대 조사인 황벽희운과 위앙종을 창시한 위산영우가 있다.

 

<백장청규>(百丈淸規)의 유래는 백장선사로부터 시작됐다. 

 

백장회해는 <선원청규>를 제정하여, 선사를 율사로 부터 독립시켰다.

 

선종 1대 조인 달마대사부터 이때까지 율원에 더부살이를 하던 선원을 독립시켜 선종총림을 수립되게 하였다. 이 말의 뜻은 설명하자면, 현재 우리나라 사찰 중에 총림이라고 하여 선원, 강원, 율원을 모두 갖춘 큰 사찰이 있다.

 

사찰은 백장회해가 <청규>를 제정하기 이전에는 율원이 중심이 되어 선원이 더부살이를 했는데, <청규> 제정 이후에는 독립이 되어 총림이라고 하는 큰 절이 형성되었다는 뜻이다.

 

백장회해의 <청규>를 <백장청규>라고 하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로(長老)를 방장(方丈)으로 추대하여 법을 설하게 한다.

불당(佛堂)을 세우지 않고 중앙에 법당(法堂)을 세운다.

전 대중이 보청(普請)법에 의거하여 노동생산에 참여한다.

대중생활에서 규범을 어긴 자에 대한 벌칙을 세운다.

 

<청규> 중에 노동생산 참여 규정은 백장회해가“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는 말로 강조했다. 노동 자체가 선수행이라고 보았다. 조선시대 말에 용성(龍城), 학명(鶴鳴)에 의해 선농불교(禪農佛敎)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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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적봉 용화선원을 찾은 스님들과 대담을 나누고 있는 무진 선원장.

 

무진 선원장은 조선 시대 허응당 보우 선사를 존경한다고 했다.

 

허응당 보우(普雨: 1515~1565)는 조선 명종 때의 승려이다.

 

호는 허응당(虛應堂)·나암(懶庵)이다.

 

보우는 1530년 금강산 마하연암에 들어가 수도하다가, 명종의 모후로 불심(佛心)이 깊은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신임을 얻어 1548년에 봉은사 주지가 되었다. 그 후 선종과 교종을 부활시키고, 문정왕후가 섭정할 때에 보우는 봉은사(奉恩寺)를 선종(禪宗)의 본산(本山)으로 삼았으며 봉선사(奉先寺)를 교종(敎宗)의 본산으로 삼았다.

 

이와 더불어, 승과를 부활시키고 도첩제를 다시 실시하게 하는 등, 숭유억불 정책으로 탄압받던 불교의 부흥에 노력하였다. 후에 도대선사(都大禪師)에 올랐다.

 

그러나 이러한 불교 부흥은 문정왕후의 죽음으로 일시적인 부흥에 그치고 종막을 고하였다. 또한 보우도, 문정왕후가 죽자, 유림의 기세에 밀려 승직을 삭탈당하고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제주 목사가 참하였다.

 

이에 무진 선원장은 안타까운 마음에 보길도까지 직접 가서 보우 선사님께 다례(茶禮)를 지냈다고 한다. 근.현대의 고승으로는 경허, 만공, 용성 경봉 큰스님을 존경하며 성수 대선사님으로부터는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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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산 성수 대선사

 

성수 스님은 평소 세 가지를 강조하셨다.

“헛말 하지 마라, 헛걸음 하지 마라, 헛일 하지 마라.”

여기에 덧붙이실 때는 육바라밀 이야기를 해주셨다.

 

“육바라밀이란 곧 눈바라밀, 코바라밀, 입바라밀, 귀바라밀, 손바라밀, 발바라밀이니 경거망동하지 말고 온몸에 바라밀행이 있음을 잊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무진 선원장은 스님께서는 불법의 핵심이 신해행증(信解行證)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믿고 이해하고 행동하고 증득하는 것. 모두 스스로 해야 할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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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 선원장이 토굴

용화선원 법당에서 좌정하고 있다

 

 

가르침을 듣는 것에서 끝내지 말고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접목해 내 공부를 하라는 스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아 매일 그렇게 정진한다고 했으며 3월 3일에 제사를 지낸다고 했다.

 

스님의 임종게는 ‘수거풍래(水去風來)’다. 

 

‘물이 흘러가니 바람이 불어오네.’인데, 용화선원에서 정진하는 무진 선원장의 생활이 바로 이렇다고 했다. 

 

무진 선원장은 과거지향적인 불교 형태보다는 새로운 불교를 창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시대와 현대인에게 어필하는 불교가 돼야만 불교가 생존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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